나는 ‘방구석 철학자’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과 깊은 마음의 대화를 할 수 없다.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글을 꿰는 철학 이론 오타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곱씹어보고 그것에 압도되어 괴로워해본 적이 있는, 스스로 철학자가 되는 그 순간을 겪어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방구석 철학자들은 선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알지 못해도 자기만의 철학과 몽상에 빠져 멍 때리고 일기 등을 쓰며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마구마구 떠오르는 철학적, 존재론적, 본질적 의문에 스스로 해답을 찾아보느라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너무 심오한 생각에 힘들어하면서도 분명 그 사유하는 시간을 나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하고 단단하게 구축할 것이다. 이런 방구석 철학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단순히 ‘오늘 뭘 먹었어’ ‘어제 어딜 다녀왔어’ 의 일상 공유식 대화 이상의 것을 나눌 수 있다. 한 사람의 세계를 얕게나마 인식하게 되는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같은 지구에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 각자가 인식하는 각자만의 세계를 살고있다. 방구석 철학자들과 대화해보면 또 다른 세계에 발을 걸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세계, 나, 너, 우리, 삶, 죽음 등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자신만의 사상을 구축한 사람들과의 교류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언제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준다. 반대로 말하자면, 난 어느새 이런 ‘방구석 철학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나의 솔직한 내면을 까놓고 깊은 교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방구석 철학자들에게 몰입(overthink)은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하도록 타고난 사람들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의 내면을 저 끝까지 파헤치고 읽어본다면 분명 스스로에게조차 너무 괴로운 부분이나 타인에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을 많이 찾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방구석 철학자는 높은 확률로 ‘나는 별난 사람이구나’ ‘나는 조금 튀는 사람이구나’ 등의 생각을 하기 쉬워지는데, 이 심연의 파편을 이해해주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와의 교집합을 발견하면 분명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묘한 궁금증이 해소될 것이다. 또한 다른 방구석 철학자들의 세계를 앎으로써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고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몰입하기를 좋아하는 방구석 철학자에게 세계 확장의 기회란 아주 귀한 경험이 될 것이기에 방구석 철학자는 또다른 방구석 철학자를 찾아 교류하는 편이 좋다.

방구석 철학자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어쩌다 그 곳에 몰입하게 되었을까?  나는 나의 ‘뇌’에 존재한다. 무의식 중에 눈, 코, 입 등을 떠올리면 아주 가까이에 있는 신체기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발가락을 생각하면 저 멀리 있는 것만 같다. 도대체 출발점이 어디길래 이런 미묘한 거리 감각이 생겨나는 것인가? 나의 근원이 ‘뇌’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똑같은 내 신체의 일부일지라도 물리적으로 뇌에서 멀어질수록 나 자신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뇌’를 나 자신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본체가 되는 뇌를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따 점심 뭐 먹을지 생각 중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이따 점심 뭐 먹을지 사유 중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유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생각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무언가를 파고들어 어떤 생각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뭘 먹어야겠다’ 혹은 ‘졸려서 잠을 자야겠다’ 등의 생각은 뇌가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작은 햄스터도 이 정도의 생각은 할 것이다. 하지만 ‘왜 태어났지?’ ‘왜 살고있지?’ ‘왜 죽어야하지?’ ‘사랑은 뭐지?’ 등 추상적인 현상의 본질까지 꿰뚫어보려고 머리를 쓰는 생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사유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만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우울은 사유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라고 믿는다. 너무 심한 우울이나 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줄여봐’ 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아주 많다. 그만큼 누구나 ‘과도한 생각’이 우울과 불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넘어 사유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따라서 우울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만의 인생관과 철학관에 갇혀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의 우울을 해결해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보다, 가만히 들어주고 내 이야기도 나눠주며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 결국엔 허무감을 느껴버리게 되는 사람이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어쩌면 내가 그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유를 즐기고 우울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고, 소통의 경험을 능력껏 제공하고 싶다. 자기만의 심연에 허덕이다 결국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들 중 상담자의 객관적인 위로와 공감에 아쉬움을 느꼈을 사람이 분명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랬다. 나만의 철학과 그에서 기인한 우울을 해결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나의 세계관을 인정해주고 자신의 세계관을 나눠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예술을 통해, 작업을 통해 나와 같은 많은 ‘방구석 철학자’들이 우리만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고, 공감받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또 다른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만들고 싶다. 그 곳에서 나는 작가로서, 기획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참여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든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나까지 위로받는 경험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나는 작가인 동시에 참여자가 되고, 참여자들도 참여자인 동시에 작가가 되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세계를 공유하고 합치고 확장시키는 과정이 무조건 예술을 통해 행해져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의 깊은 곳을 나누고 교류를 통해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는 행위라면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 이런 행위가 가장 의미있게, 그리고 가장 자연스럽게 가능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매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이 택해진 것 뿐이다. 때로 말이나 글보다는 난해할지라도, 더 큰 힘으로 한 사람의 언어와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예술이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교류가 이루어지는 형식이 아닌,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 교류 그 자체이다. 형식과 상관없이 소통과 교류를 통해 세계관의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술이 될 수 있다.

방구석 철학자로 사는 것은 외롭다. 친구가 많고 적고와는 관계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시간, 즉 깊은 사유의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을 즐기고 있을 테지만, 즐긴다고 해서 절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자신의 가장 밑 바닥을 읽고 해석하며 자기만의 언어로 정리하려 할 것이다. 글로 뱉지 않더라도 머릿속에서 열심히 언어화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에 혼자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심연의 한 부분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순간이 오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반가움과 벅참을 느낄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렇다. 치부라고 생각했던 나의 밑바닥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한없이 의지하게 된다. 문자로 설명하기 애매한 심연의 어떠한 부분을 나만의 언어로 보여주는 것 (그 언어가 시각적이든 경험적이든), 그리고 누군가의 이해를 기다리고 있는 것, 그것들이 내가 작업을 하려는 이유이다. 때로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나의 세계에 압도되어 진정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예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겁을 먹는데, 작업이 이런 마음을 해소해준다면 계속해서 작업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이 자신의 심연을 마주하느라 고통받는 사람들이 나의 작업으로 조금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을 관객인 동시에 자신들의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기꺼이 초대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인 나와 관객 또는 참여자가 될 다른 이들 사이의 경계를 최대한 허물어, 모두가 이해와 존중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

바닥이 어디일지도 모르는 심연의 바다에 발을 담그기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면, 두렵더라도 일단 뛰어들어 탐험해보기를 추천한다. ‘나’만의 바다를 헤엄치는 행위를 통해 분명 그 어느 책이나 영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자신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잠은 자연이 주는 귀중한 선물이자 친구이고 피난처이며 마법사이자 따뜻한 위로자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 불면증으로 괴로워하고 새벽녘 쪽잠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느낀다. 그렇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을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은 아마 가장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 「잠 못 이루는 밤」, 『밤의 사색』, 배명자 옮김, 북로드, 2020.
*원문: Hermann Hesse, 「Schlaflose Nächte」 in 『Die Kunst des Müßiggangs』, 1973.


20250705